음악 감상과 음악 감상으로의 치유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가장 처음에 드러난 음악치유사역자를 다윗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다윗은 찬양을 통해서 악신이든 사울을 치유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음악사에서는 음악이 처음 만들어진 배경이 주로 군인들이 전쟁에 나갈 때
그들의 개인 생각을 떨치기 위해 군가를 부름으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고
동서양의 샤머니즘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낼때에 춤을 추고
노래를 부름으로 시작이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음악을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부르는 것은 아주 큰 힘이 있습니다. 때로는 좋은 영향력을 가지게 되며
때로는 나쁜 영향을 가지게 됩니다. 이는 뉴 에이즈나 사탄음악에서 많이 드러난
사례들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선교적 칸타타 “그날이 오기까지(1997)”를
처음 작곡할 때에 작곡가 칼 오르프의 자유의 여신에 대한 세속 칸타타를
스코아 악보(악기 전체가 나와 있는 악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서 개인적으로
감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선교헌신을 하고 어릴 때 다니던 교회를 섬기면서
도 다른 개척교회 청년부 교육을 섬기고 한 고등학교의 서클 활동인 예배시간에
찬양과 상담선생님으로 섬기면서 하나님을 나름(다른 사람들이 표현하기에도)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섬길 때였습니다. 물론 금식과 기도와 매일 드리는 찬양예배와 말씀을
읽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많이 경험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고신 대학교에서
종교음악 작곡을 전공하면서도 신학과 수업과 선교언어학과 수업을 같이 듣고 외부
선교단체에 좋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참여하여 다른 곳에는 눈을 돌릴 틈이 없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 보기에 그리고 지금 제가 생각하기에도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음악을 들을 때에 음악에 대한 효과가 저를 너무도
음악에 매료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음악을 다 듣고 제게 다가오는
각이 ‘그 신 위대하다’라는 찬양이 나왔습니다. 물론 저 스스로에 대하여 놀라서
바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구하고 다시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왔지만
음악이 주는 효과가 그렇게 클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저의 신앙을 나열한 이유는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신을 찬양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 때 당시 제가 생각하기에 그 음악과 기법이 너무 멋있게
보였기에 마지막까지 들은 저는 음악의 힘 때문에 비록 순간이지만 음악이 찬양하고
있는 그 신을 찬양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음악이 주는 힘을 설명한 것입니다.
또한 그 시간을 통하여 제가 작곡하려는 선교적 칸타타 “그날이 오기까지(1997)”를
작곡할 때 더욱더 하나님의 힘을 의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므로 치유를 위한 음악 선택은 아주 중요합니다. 특별히 작곡가에 따른 음악의 선별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음악은 작곡가의 영성과 가치관과 사상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어떤 분들은 예술가에 대하여 ‘그 예술가의 혼이 들어가 있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작곡가의 음악을 듣느냐 하는 것은 듣는 사람들의
정서를 어떻게 변화시키느냐를 결정해주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학교시절부터 사춘기 시절인 20살까지 저는 낭만파음악에 굉장히
몰두해 있었으며 선율의 천재인 슈베르트(지금도 슈베르트의 선율이 떠오르면
잠시 그 선율에 빠지지만 바로 절제하고 그 음악에서 나옵니다.)나 감성을 자극하는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 바이젠’이나 멘델스존과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등에
넋이 나갈 정도, 더 과하게 표현하면 ‘미쳤다’고 할 정도로 몰두 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저의 삶은 너무 정서에 민감하여 좋은 말로 풍부하였지만
철학적으로는 아주 염쇄적이었으며 영적으로도 좋지 않은 영향도 많이 있어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문학도 헤르만 헤세나 칼릴 지브란 등
비기독교적인 책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나마 저를 지탱할 수 있었던 것
은 성경을 매일 3장씩 읽어나간 것이 알게 모르게 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춘기 시절 여러 가지로 힘이들 때 혼자서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감동을 주시고
울게 하시고 만나 주셨던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아니, 지금은 그 이상으로 저를
감동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후 20살 하반기에
하나님께서 제가 음악을 우상 숭배한 것에 대해 알게 하셔서 100장이 넘은 클래식 LP를
버리고 음악을 듣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선교헌신을 한 29살 경부터
바하, 하이든, 비발디 등 로코코, 바로크 음악을 다시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후 저를 돌아 볼 때에 이전의 저를 비교해 볼 때 감성보다
이성이 발달되어 있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정리하면 낭만파 이후의 음악은 형식이 무너져 자신의 감정 그대로를 표현하기 때문에
듣는 이들을 굉장히 감성적으로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낭만파 음악은
거룩하지 못하거나 비성경적인 작곡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슈베르트는
성병에 걸려 술집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모차르트의 후기음악은
사탄 집단에 들어간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모짜리트의 전기 작품은 아주 간결하고
심플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리하르트 시트라우스는 샤머니스트과
사귀면서 그녀의 영성을 받아들임으로 우상숭배에 대한 곡을 많이 썼으면 드뷔시는
아라베스트등 모슬렘의 사원인 모스크를 음악으로 표현 한 것을 보면 그의 종교는
비기독교적이라고 볼 수 있으며 쇈베르크는 12음기법이라는 것을 창시하였는데 이는
다른 이방 종교의 종교의식과 접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12음 기법을 계속적으로 듣는 사람들은 정신분열증이 생기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작곡가의 음악을 추천합니다. 바로크, 로코코,
전기고전(하이든)까지의 작곡가 등은 대부분 사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로 비발디와 바하를 꼽고 있으면 하이든도 포함합니다. 그러나 그 외의 헨델 등
거의 모든 작곡가들은 대부분 교회를 섬기면서 아주 깨끗한 영성으로 교회와 음악에만
전념한 작곡가들입니다. 이러한 음악을 듣는 것은 정신을 고양시키며 절제력을
키워줍니다. 후기 고전과 낭만파이후의 작곡가는 멘델스존이 사제였습니다.
그의 음악은 아주 감성적입니다. 참조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일반 기독교
음악으로 착각하시는 경우들이 많이 있는데 베토벤의 교향곡 합창에서 나오는 조물주는
기독교의 성경에서 나오는 조물주 하나님이신 여호와 엘로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조물주를 칭송하는 곡이라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물론 베토벤의 음악사적인 공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추천할 몇 가지 곡 명
1. 전기 고전 이후(절제와 이성을 회복하기에 도움이 되는 음악) :
비발디의 영광송, 하이든의 천지창조, 헨델의 메시아전곡 바하의 칸타타외 그리고 로코코음악
2. 후기 고전과 낭만이후 음악(억압받은 감성을 풀어주기에 좋은 음악):
구노의 성세실리아를 위한 미사곡, 멘델스존,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쇼팽의 왈츠, 피아노협주곡외
브르후의 바이올린 협주곡, 브르후의 콜니드라이(이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헤브리의 옛 성가곡을 첼로와 오케스트라 악기로 변주한 곡입니다.)
3.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나 그 외 피아노 소나타 등도 나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구노의 성세실리아를 위한 미사곡은 제가 가슴 저미도록 좋아하는 곡입니다.
이는 교회 박해 시절에 성 세실리아 수녀의 순교하신 것을 의미로 작곡한 것인데 내용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여기소서(키리에), 축복(베네딕투스), 사도신경(크레도), 거룩(쌍투스), 하나님의 어린양(아누스 데이)등으로 이어져
있는데 성세실리아 수녀님이 마지막 순교할 때에 마지막 소원을 말하라고 했을 때에
“오르간을 가져다 주면 내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환하게 웃으면서 찬양할 때에 나를
죽여 달라”고 해서 오르간을 가져다 주어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그녀의 얼굴에 휘광이
떠 올랐다고 합니다. 그럴 때 순교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구노가
작곡한 곡인데 사람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없고 신앙고백인 사도신경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어린양되신 예수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내용을 이어져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신경의 장엄함과 쌍투스(거룩)에 대한 곡은 심금을 울리게 합니다.
이전에 CD가 있었는데 이사를 자주하고 여러 사람들을 빌려 주면서 제가 아끼는 CD를
잃어 버렸는데 지금도 그 음악을 상상만 하면서도 가슴을 저미며 그리워하며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저는 21살에 어느 합창단에서 이 곡을 듣고 이 곡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 곡을 연습하면서 저의 소원이 저도 “저도 찬양하면서 죽게 해 주세요”라고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과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을 찬양하면서 하늘의 보좌와 하늘에서 이어질 예배(요한계시록 5장, 7장, 21장,
22장)를 사모하면 하늘나라에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5장, 7장, 21장, 22장의
실현을 저의 삶의 존재 이유와 목적으로 삶고 지금도 저의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4. 그리고 부끄럽지만 부족한 저의 곡을 설명하면 에덴이야기(부제목:가죽옷의 사랑)은
창조, 타락, 대속, 회복에 대한 복음을 챔버 오케스트라로 표현한 곳인데 오케스트라로
확대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선교적 칸타타 그날이 오기까지는 이사야 6장과 요한계시록
7장을 연결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된 하나님의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시고 부르실 때에 헌신하여서 모든 나라와 민족과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 하나님
께 예배하게 되는 것을 표현한 곡인데 두 곡의 기법에서 특이한 것은 서양음악에서 한국
전통음악을 가미한 것입니다. 한국의 국수주의 떠나 세계 속에서 함께가는 한국 민족을
함께 표현한 것이며 이는 비록 작곡할 당시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남과 북이 하나 되어 세계선교를 이루실 것에 대한 것과 같은 맥락임을 볼 때
제 스스로도 놀랍습니다. 에덴 이야기(부제; 가죽옷의 사랑)에서 특이한 것은 3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표현할 때에 악기로 채찍과 망치를 함께 사용함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표현하였으며, 선교적 칸타타 “그날이 오기까지”의 요한계시록 7장에
대한 것은 모든 나라와 민족과 족속과 백성이 모두 회복되는 그날을 기대하면서 일반
서양음악과 이스라엘 교회 선법과 한국 전통음악과 흑인들도 잘 부를 수 있는 아메리카
블루 째즈를 삽입하여 각기 자신의 민족과 각자에게 주시는 다양함을 가지고 통일성 있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상상하면서 작곡하였고 마지막에 아멘 송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5. 그 외에 최근에 저와 같은 마인드로 작곡한 작품들이 연주회 팜플렛으로 붙여져 있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현재 저는 음악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지 못하는 사정이라 연주를
보지는 못했지만 성경적 관점에서 작곡한 음악들은 들을 때에 정서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영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리고 7일 저작자 @왕의대로 출판사 김미란 마리스더 선교사 (2011)
http://trtk.onmam.com/ http://beloved.onmam.com/
worshipist@daum.net worshippist@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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